속초사잇길 걷기 후기공모 대상(大賞)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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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사잇길 걷기 후기공모 대상(大賞) 작품

운영자 0 4,921 2020.12.14 11:20

속초사잇길에는 내가 있다. (글쓴이 이현주)

 

걷고 걷는다. 걷는 시간이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걸으면서 천천히 바라보는 일상은 여행이다. 사잇길을 걸을 때마다 친숙하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풍경들은 어릴 적 선물 받은 과자상자 같다. 새로운 과자를 하나씩 꺼내먹는 즐거움이다. 걷기는 한발 치 떨어져 여행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일상을 만들어준다. 새로움을 발견하는 기쁨, 어느 방향을 디뎌도 이어지는 길에서의 자유와 여유로움이 행복감을 만든다. 시간이 날 때마다 사잇길을 걷는 이유다.

살이 빠졌다. 아이 낳고 20년 동안 늘어날 줄만 알았던 몸무게가 쑤욱 줄었다. 어깨 통증이 없어졌다. 컴퓨터 앞 사무직의 숙명이라는 욱신거리는 어깨통증이 사라졌다. 이 또한 어깨에 날개 단 듯 사잇길을 걷게 만든다. 자주 걷는 자만이 느낄 수 있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걷기 생활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나의 자세다.

속초사잇길 10길 가운데 추천하는 길을 꼽으라면 단연 제1길 영랑호길이다. 울산바위와 달마봉이 우뚝 선 설악산능선들을 조망하며 호젓하게 걸을 수 있다. 저절로 사색에 빠지게 된다. 세상 모든 근심을 다 받아줄 것 같은 잔잔하고 드넓은 호수는 상처입고 지친 마음을 다독여주고, 평온을 찾게 한다. 이따금 무리지어 다니는 오리 때와 철새를 만날 때면 추수 앞둔 넓은 대지를 바라보는 것 같은 충만함에 황홀하다. 영랑호에서 바라보는 해질녘 서산노을은 또 얼마나 눈물 나게 하는가. 세상 고요한 아름다움의 슬픔이다. 추천하는 길과 달리 제일 좋아하는 길은 제3길 수복길이다. 북적거리는 삶이 있어서 좋다. 시청뒷산을 지나 시장중심부 마을 사이렌 동네 골목길과 속초관광수산시장, 40계단 마을길. 오밀조밀한 낮은 지붕들이 이마를 맞대듯 붙어있고 경사가 낮은 좁은 골목 시멘트 계단은 정겹다.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모를 수가 없는 구조다. 건넛집 기침소리에 잠이 깨기도 하겠다. 빨랫줄에는 깨끗하게 손질된 생선이 해바라기하고 흙 품은 아이스박스에선 대파, 상추, 고추가 자란다. 방울토마토도 화분에서 꽃피운다. 좁은 마당에 줄지어선 화분과 아이스박스, 빨간 고무대야가 사랑스럽다. 골목길을 걸으며 시간여행을 한다. 유년시절 콩닥콩닥한 숨소리가 들릴 새라 가슴부여잡고 동네친구들과 숨바꼭질하던 내가 보인다. 아마 누군가 이곳을 걷는 내 눈을 봤다면 사랑가득한 자의 미소가 흘러넘치는 눈빛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재개발이 예정돼 있어 일부골목 폐가들이 스산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시장골목길은 덕지덕지 삶이 묻어나는 길이다. 이뿐 아니다. 관광수산시장 먹거리 골목길은 속초의 핫플레이스다. 몇 년 전부터 속초여행객들에게 이곳은 필수코스다. 갈 때 마다 새로운 먹거리가 보인다. 북적대는 사람 탓에 뒷사람에 등 떠밀려 골목길을 걸어도 맛보기 음식들은 빼놓지 않고 먹는다. 걷는 자의 먹는 즐거움은 졸릴 때 가장 편한 자세로 잘 수 있는 만족감이다.

속초사잇길 10길을 골고루 다 걸었다. 청초호길이나 속초해변길, 아바이마을길은 일주일에 두세 번 연달아 걷기도 한다. 길이 닳을까 걱정될 정도로 많이 걸었다. 속초사잇길 11길을 추천하고 싶다. 설악동 C지구 산책로 길이다. 설악 힐링 온천 마을(속초시 청봉로141). 속초의 생명수 쌍천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봄에는 벚꽃을 여름에는 짙푸른 신록과 우렁찬 물줄기를, 가을에는 화려한 단풍을, 겨울에는 본질에 충실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여기에 맛난 음식과 다양한 문화행사가 어우러질 공간도 있다. 속초관광수산시장의 먹거리를 이곳에서 맛 볼 수 있게 마을공동체간 협력하면 어떨까. 침체된 설악동 마을에 관광객들을 분산하는 효과도 있지 않을까.

도심을 걷는 속초사잇길 10길은 모든 길에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내가 있다. 일상이 여행자의 시선으로 행복할 수 있는 내가 있다. 우리 아이들도 이 길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